이해라는 문(박준) + 종암동(박준) 창비교육 공통국어
최근 시인 중에서 박준이라는 시인이 한국 문하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대중적 인기와 문학상 수상 등으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창비교육 공통국어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계절 산문' 수필집에 수록된 '이해라는 문'이 '깊고 넓게 읽기'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학창 시절 자주 가던 분식집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며 쓴 글로, 오백 원짜리 떢볶이를 시켜도 천 원짜리 정식과 동일한 메뉴가 나온다는 사실을 의아해하던 작가와 친구들이 분식집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을 짚어 보면서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된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 내용입니다.
-------------------------------------------------------------------------
교문을 나와 십 분 정도 걸으면 그 분식집이 있었다. 한적한 주택가 건물 반지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나와 친구들은 그곳을 세균 떡볶이라 불렀다. 별명의 연유는 모르겠지만, 전부터 학교 선배들과 동네 아이들이 그렇게 불러 온 것.
세균 떡볶이에 들어가면 긴 테이블과 늘어진 의자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별명을 무색하게 할 만큼 깔끔한 주방이 있었다. 오명에 가까운 별명에도 세균 떡볶이는 인근에 사는 초등학생부터 동네 순찰을 도는 의무 경찰들까지 단골로 찾던 집이었다.
벽면에는 굵은 유성펜으로 메뉴가 적혀 있었다. 라면이나 김치볶음밥 같은 것도 있었지만 나와 친구들은 매번 한 가지 메뉴만을 주문했다. 튀김 세 개와 삶은계란 하나가 떡볶이와 함께 범벅이 되어 나오는, 세균 정식이라 부르던 그것. 값은 천 원. 지금으로부터 오래전 그리고 우리가 고등학생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천 원은 그리 큰돈이 아니었다. 덕분에 토요일 점심마다 정기적으로 들렀고 평일 저녁에는 부정기적으로 그곳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세균 떡볶이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매번 먹었던 정식이 아닌 떡볶이만을 주문해 보았는데 값은 오백 원이며 심지어 세균 정식과 동일하게 튀김 세 개와 삶은계란 하나가 함께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농담은 재미가 있을 때 농담일 수 있다고 친구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당시 1999년에도 오백 원은 돈다운 돈이 아니었다. 서울 지하철 기본 구간 운임 오백 원, 서울 택시 기본요금 천삼백 원, 막 국내에 1호점을 낸 다국적 커피 전문점의 아메리카노 쇼트 사이즈가 이천오백 원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크게 억울해하면서 오늘 학교를 마치는 대로 세균 떡볶이로 가자고 했다. 자기가 떡볶이를 사겠다고 덧붙이며.
오백 원짜리 떡볶이를 각자 하나씩 시킨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정말 정식과 똑같이 나오면 천 원을 주겠다. 안 나오면 네가 천 원을 내놓아라.”, “천 원 받고 딱밤 열 대 더.” 같은 내기를 했다. 검은색 페인트로 칠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밤하늘 같아.”라고 했다가 “시인 같은 소리 하네.” 핀잔을 들은 기억도 있다. 시인이 아니라 시인 같은 것이지만, 어쨌든 내가 시인 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어 떡볶이가 나왔다. 제보를 했던 친구의 말처럼 오백 원짜리 떡볶이는 천 원짜리 모둠과 동일한 구성과 양이었다. 이 놀라운 발견 앞에서 우리들은 제값 천 원을 주고 먹었던 지난 시간을 후회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세균 떡볶이에 갈 때마다 세균 정식 대신 오백 원짜리 떡볶이를 주문했다. 마치 세계의 큰 비밀을 우리만 엿본 것처럼 즐거웠다. 떡볶이와 튀김과 삶은계란의 조합은 왜 질리지 않을까 의아해하면서.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우리는 다시 천 원짜리 세균 정식을 시키기 시작했다. 먼저 그렇게 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모두들 비슷한 시기에 했던 모양이었다. 분식집 사장님이 왜 오백 원짜리 떡볶이를 천 원짜리 모둠과 동일하게 내주는지, 이유는 여전히 몰랐지만 그 마음을 짚어 보는 순간이 우리에게도 찾아왔던 것이다.
아쉽게도 그 분식집은 몇 해 전 문을 닫았다. 우리들에게 어떤 문 하나를 활짝 열어 주고서.
― 『계절 산문』
--------------------------------------------------------------------------------------
참 아름답죠.
박준 작가는 시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여기서는 최근 신문 지상에 소개된 박준 시인의 '종암동'이란 시와 문학 집배원에 소개된 '환절기'를 소개합니다.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1/26/TH3FFRIOINC3VDMNC4BTGW5H2A/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55] 종암동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55 종암동
www.chosun.com
https://www.youtube.com/watch?v=lrUxrme6knA&loop=0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55] 종암동
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박준(1983-)
냄새는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안방이나 이불, 옷장의 옷으로부터 맡게 되는 냄새에는 기억이 배어 있다. 특히 옷은 기억의 실오라기나 기억의 털로 짠 것만 같아서 옷에는 살냄새가 난다. 통 기억이 나지 않다가도 어떤 공간에 들어서거나 사물을 보는 순간 시간의 저 깊은 곳에 먼지를 소복하게 뒤집어쓴 채 있던 기억은 일순에 되살아난다. 마치 소매를 왈칵 잡아당기듯이.
박준 시인은 “흘려보낸 날들의 뒷모습을 봅니다. 사람의 기대 같은 것으로. 뒤늦음으로”라고 글을 썼는데, 시인은 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통해 시행(詩行)에 옛 기억을 살려낸다. 시인의 아버지에게 종암동은 옛날의 감회가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아버지는 마음 한구석이 짠하고 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글썽인다. 아버지에게도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있음을 가끔 잊고 산다.
--------------------------------------------
환절기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바다의 기수역과도 같은 환절기를 통해 만남과 이별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었으면 축농 같은 장면이라고 하였을까. 회유하는 은어들처럼 여행을 떠난 연인들의 사랑은 가난하다. 끝물 과일들이 가난을 위로하듯이 만남의 끝에서 지난 절기들을 외워 보는 건 망망대해에 어쩌면 홀로 떠나야 할 바닷길을 열어 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물복숭아를 닮은 무릎의 차가움을 새로 알게 된 여행이 있어서 떠나가는 계절은 새로 맞은 계절 속에서도 쉬 잊히지 않으리라. 통영은 좋겠다.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백석, 「통영」 중)다고 노래한 백석의 후예들이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아직 잊지 않고 있어서. (손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