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양 선생님이 '문학과 사회'라는 문학과지성사 전문 잡지에 이유리 작가님의 '브로콜리 펀치'에 대한 평론을 쓰셨습니다.
'성장의 계절'
이유리, 『브로콜리 펀치』(문학과지성사, 2021)
송지현,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문학동네, 2021)
- 문학과 사회 2022년 봄호 제35권 제1호(통권 제137호)
- 2022.2 244 - 254 (11page)
여기에 있는 '브로콜리 펀치'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서 공유합니다.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에서도 성장과 애도라는 문제적 상황 이 병치된다. 소설이 시작되는 어느 날 아침 ‘나’는 두 개의 문자메시 지를 받는다. 하나는 “원준의 오른손이 브로콜리가 되었다는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안필순 할머니 댁의 말자가 죽었다는”(p. 77) 소식 이다. 오른손이 브로콜리가 되었다니?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이 사건은 그러나 서사 세계 안에서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로 취급받지 않는다. 박광석 할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젊은 시절에도 생각 이 많거나 마음고생을 한 이들에게 “손가락이 강낭콩이 되고 버얼건 고추가 되”(p. 91)는 사건은 종종 일어나왔으며, 시중에는 이미 원준 과 비슷한 증상이 생긴 이들을 위해 “엽록소를 억제하는 약”(p. 87) 도 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인간의 신체에 식물이 자라는 현상은 고통스러운 내면의 감정이 몸의 표면으로 돋아난 증 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의료 자본은 이 환상을 병리적인 것으로 취 급하여 치료의 대상으로 다루는 일에 익숙한 상황인 듯하다. 달리 말해 이 세계에서 환상성은 기존의 의미 체계에 이미 포획되어 있으 며, 그것만으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원준 의 손을 브로콜리로 만들어버린, 그가 느낀 감정적 고통에 대한 이 야기다.
복싱을 잘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냐. 집중이야. 뭐에 집중 하냐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새끼를 곤죽으로 만들겠다는 집중. 왼 손으로 안 되면 오른손으로, 오른손으로 안 되면 머릴 들이받아서라 도 뻗어버리게 만들어야겠다는 집중. [……] 그런데 너 살면서 그런 상상을 해본 일이 있냐. 진짜로 미워하는 사람이 너에게도 있었겠지만, 그 사람을 때려서 무너뜨리는 모습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그려내본 적 이 있냐 말이야. 나는 심지어 그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해. 복싱에 목숨 걸고 나랑 비슷한 삶을 살아왔을 이 사람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런데 그런 사람을 곤죽으로 만드는 상상을 하는 게, 실제로 곤죽으 로 만들기 위해 주먹을 내뻗는 게 어느 순간부터 되게 힘들어진 거야. (pp. 96~97)
어쩌면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군가와 경쟁하고 그 로부터 승리나 패배를 맛보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점점 더 혹독한 경쟁을 강요받는 생존 투쟁의 체제 속에서 개인의 자연스러운 경쟁심은 패배와 탈락에 대한 공포로 쉽 게 변질되며, 이는 다시 타인을 향해 휘두르는 폭력에 대한 감각을 점차 무뎌지게 한다. 아마 원준이 처음 복싱을 시작했을 무렵, 링 위 의 상대는 비록 경기 중에는 최선을 다해 때리고 넘어뜨려야 하는 사람일지라도 경기가 끝나면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는 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링 밖의 경쟁 시스템은 원준이 더는 자신의 동료를 건강한 스파링 상대가 아닌 반드시 이기고 무찔러야 할 적으로 간주 하도록 한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시스템 안에서 원 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인 복싱이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해하 는 폭력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항상 권투 글로브가 끼워졌을 원준의 오른손에 갑자기 생겨난 브로콜리 한 송이는 바로 이렇듯 타인을 향한 폭력을 거부하고자 하 는 그의 마음이 환상적인 것으로 표출된 결과이다. 이 소설의 후반 부에 이르러 원준의 브로콜리는 샛노란 꽃봉오리를 피우고 진한 향기를 내뿜은 뒤 완전히 시들어 다시 원래 손의 모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와 같은 낙화 (落花)의 장면은 원준이 자신이 좋아하는 복싱 을 하며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한 시절과 결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로콜리 펀치」가 다른 무엇보다 미더운 점은 바 로 생존 투쟁 시스템 안에서 내면의 갈등을 경험한 인물이 다시 그 것을 극복하는 성장의 과정 속에서 폭력이 소거된 무해한 세계를 향 한 시야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쟁 체제의 잔혹성과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도, 그것이 유발한 상처를 다시금 엉뚱한 모습 으로 그려내는 이 소설은 환상이라는 형식과 작품의 주제적 메시지 가 다정하게 공존하는 드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마 복싱을 그만둔 원준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 백지 상태에 서게 되듯이, 인생에서 급작스러운 변화나 뜻밖의 단절을 경 험한 사람들은 앞으로의 진로와 정체성을 새롭게 창출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백지상태는 기실 실패나 변화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거대한 공백의 세계와 맞닥뜨 리는 경험이기도 하다. 이때 자본주의 시스템은 실패에 따르는 몫을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자기책임주의를 통해 체제를 유지 한다.(하략)
'국어 > 공통국어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운 변동 확인하기 문제와 해설(창비교육 공통국어) (0) | 2025.02.27 |
---|---|
이유리 '브로콜리 펀치' 관련 논문(창비교육 공통국어) (0) | 2025.02.26 |
재수*오은 '나는 오늘'(창비교육 공통국어) (0) | 2025.02.26 |
고등학교 첫 수업에 사용하면 좋은 시(2022개정 공통국어 첫 문학 작품 모음) (0) | 2025.02.26 |
나만의 지도를 그리는 법(창비교육 공통국어) (0) | 2025.02.26 |